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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양식/영화를 보자

[다큐멘터리 리뷰]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 feat.전주국제 영화제

by 김알람 2022.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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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국제 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5월 1일엔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를 보았다. 거의 일주일 전에 본 영화 리뷰를 지금 쓴다. 전주까지 간 김에 픽션을 하나 보고 싶었는데, 보고 싶은 영화가 모두 매진되어 그냥 아무거나 선택한 게 이 다큐였다. 리뷰를 하기 앞서 나는 밀란 쿤데라 책을 하나도 읽은 적 없음을 밝힌다. 

 

다큐멘터리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작가인 밀란 쿤데라를 인터뷰하고 싶어 하는 한 청년(이 다큐 감독)으로 시작한다. 청년은 밀란 쿤데라를 알고 있는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며 어떻게 하면 밀란 쿤데라와 인터뷰할 수 있는지를 묻고, 전문가들은 밀란 쿤데라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관객이 그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서 밀란 쿤데라를 알아갈 수 있는 형식의 다큐다. 굉장히 익숙한 방식인데 2022년에도 이런 방식의 다큐를 볼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클래식은 영원한가 보다. 

 

스포를 하자면 (스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포스팅을 읽는 걸 멈춰주길 바란다)

 

 

 

 

 

 

 

 

---스포 방지---

 

 

 

 

 

 

 

 

 

밀란 쿤데라는 못 만난다. 다큐는 밀란 쿤데라가 인터뷰를 거절할 때 하던 말인 '나(밀란 쿤데라)를 알고 싶으면 책을 읽으면 된다'로 끝난다. 밀란 쿤데라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책 속에 들어있으니 인터뷰 요청을 하지 말고 책을 읽으란 말이다. 왠지 그렇게 끝날 것 같았는데 역시 그렇게 끝났다. 

 

내 양 옆에 앉은 사람들도 중간부터 졸기 시작했고, 나 역시 때때로 고비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밀란 쿤데라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는 체코가 러시아에 점령당하면서 작품 활동과 교직활동을 모두 금지당했고 가명으로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프랑스에 와선 반체제 주의 작가로 다뤄졌으나 자신의 삶의 배경에 의해 소설이 해석되는 것, 평론가들이 자신의 삶의 궤적을 보고 제 입맛에 맞게 소설을 카테고리 화하는 걸 불만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의 소설은 잘 알지 못하지만 다큐를 보자 그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 알게 되었다. 일단 굉장히 통제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것 같다. 다큐 속에는 구두점(.)이나 쉼표(,)를 찍는 것 하나 허투루 하는 것이 없는 그의 일면이 그려진다.

 

가장 충격적인 건 번역이 의도를 살리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밀란 쿤데라가 불어로 직접 번역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 외국어(불어)로 번역을 했고, 프랑스 시민이 된 후에는 불어로 소설까지 썼다. 모국어로 문학을 쓰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한글을 모국어로 쓰지만 아직까지도 한글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한다. 글을 쓸 때면 내 의도를 정확히 표현할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영어와 같은 외국어는 그 느낌이 배가 된다. 마치 얇은 비닐 막이 씌워진 것처럼, 내 의도를 정확히 말하거나 쓸 수 없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된다. 그런데 외국어로 문학을 쓴다니. 이 점은 정말 밀란 쿤데라가 존경스럽다.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밀란 쿤데라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계속 듣고 있자면 잠이 솔솔 온다.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다큐멘터리를 보았지만 다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 조각과 짧게 등장하는 밀란 쿤데라의 작품에서 생각할만한 재미있는 지점도 찾을 수 있었다. 

 

다큐에서 한 감독은 말했다. '밀란 쿤데라는 굉장히 지적인 사람으로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어떤 특권을 쟁취해낸 것 같은, 그의 지식이 나에게까지 공유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게 한다고. 또 다른 사람은 틀을 거부하자 그를 비난했던 평론가들을 이야기하며 '유명인을 비판(을 가장한 비난)하면서 느끼게 되는 나르시시즘적인 우월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후반부에 밀란 쿤데라는 말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모든 작가들이 가명으로 자유롭게 작품을 내는 세상'이라고. 이게 그의 진심인지 반어법인지는 알 수 없다. 보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고 관객의 판단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더 이상 작품 외의 방식으로 세상에 자신의 일면을 공개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으니 말이다. 

 

예전에 책 리뷰를 쓰면서 <토탈 이클립스>의 대사 하나를 언급한 적이 있다. 랭보의 대사인 '내가 타인을 보는 것처럼 타인이 나를 보는 게 두렵다'는 한 문장이었다. 나는 중학생 때 내가 유식하고 세상의 본질을 남들보다 더 잘 꿰뚫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의견을 말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틀려도 그게 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여러 가지를 접하면서 나는 내 생각이 변하는 걸 경험했다. 과거에 확신을 가지고 A라고 말했던 것이 사실은 B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된 것이다. 대학생 때의 나는, 여전히 거침없이 말했지만 중학생 때의 나와 다른 점이 있었다. 사적인 자리에선 나의 생각을 직언하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선 입을 다물게 된 것이다.

 

사람은 성장하고, 나 또한 성장하며, 사람의 생각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변화한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10살 때의 그 사람과 20살 때의 그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만약 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이다. 나는 나이가 들면 사람의 생각은 변한다는 사실을 시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시기에 따라서 바보나 멍청이 같은 말을 하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된다는 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 역시 모두와 같은 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남들이 별 의미 없이 말했던 칭찬인 '너는 통찰력이 있다'는 말이 내 속에서 너무 커졌는지도 모른다. '통찰력이 있는 나'라는 남들이 보는 내 가면이 처음에는 자랑스러울 뿐이었지만, 진짜 나와 가면 사이에 간극을 보일수록 초조해졌을지 모른다. 가면과 진짜 나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앎에도 말이다. 완벽한 사람이란 건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잡을 수 없는 허상이기 때문에. 

 

어쩌면 밀란 쿤데라도 사회적 가면에 짓눌림을 느낀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내 안에서 커져가는 가면의 위상과 그에 비례해 작아지는 결점 있는 진짜 내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로 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역시 나의 추측일 뿐, 진실은 그의 마음속에만 있다. 

 

<토탈 이클립스>의 랭보는 자신의 유부남 가정폭력범 애인에게 묻는다 나의 육체와 영혼 중 하나만 고른다면 무엇을 선택할 거냐고. 영혼은 변하지 않지만 육체는 변화한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개인적인 경험이 영혼에 영향을 준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몸이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타인은 우리의 몸을 통해서 우리를 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진짜 나(영혼)를 일부 반영하지만 사실은 나와는 다른,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은 더 많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이 모습을 진짜 나로 생각할수록 점점 더 강화된다. 

 

인간과 다르게 작품은 살아가지 않고 멈춰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며 경험하는 스스로의 변화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의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 밖의 시간이 달라지면서 작품의 재평가가 있겠지만, 타인이 떠들어대는 작품의 의도와 의미만 달라질 뿐, 그 작품은 영원히 그때 그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결국 작품의 세계란 영혼만이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작가나 시대는 작품을 볼 수 있게 하는 몸의 역할로, 우리는 그걸 통해서 작품을 볼 수 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모든 작가들이 가명으로 자유롭게 작품을 내는 세상'은 작품과 작가의 연결이 끊어진 세계로 어떻게 보면 몸과 연결이 끊어진 영혼의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작품의 의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니 올바른 해석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겠지. 만약 작가의 사생활과 그 이외의 모든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작품만이 공개되는 세상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세계에서의 비판은 작가에게 영향을 주지도 않을 것 같다. 내가 가명으로 작품을 냈는데 사람들이 나를 막 욕한다. 그리고 현실의 나는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 작품과 나의 연결고리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의 비난도 내 현실 세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러면 타인의 비난도 정당한 비판도 일상의 소음처럼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영혼을 갈고닦으며 착실히 성장하여 점점 성장하는 작품을 내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타인과 교류 없이 자신의 세계에 매몰되어 결국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창작물을 내보일 수 있는 세계에선 창작성이 극대화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악영향을 주는 창작물도 늘어날 것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며 우리는 익명성이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졌는지 이미 알게 되었지 않은가?

 

분명한 건 그런 세상이 도래하더라도 사람들은 책들에 적힌 사람을 궁금해할 거란 사실이다. 인간은 타인과 연결되길 바라고 영혼은 볼 수 없으며, 우리는 몸을 통해서만 그 사람의 영혼을 간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작품에서 완벽함을 추구했던 밀란 쿤데라. 온점과 쉼표까지 통제하고 싶어 하는 밀란 쿤데라. '모든 작가들이 가명으로 자유롭게 작품을 내는 세상'을 바란다는 밀란 쿤데라. 그가 왜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는 나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다큐멘터리는 지루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이만 다큐멘터리 내용보다는 파생된 생각이 주였던 리뷰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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