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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재활기/2022 통영

[3박4일][통영여행]02. 안녕, 내가 없어도 되는 서울

by 김알람 2023.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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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옛날얘기로 돌아가 본다. 올해 초 밀리의 서재를 구독했을 때 나의 목표는 매일 열심히 책을 읽어서 블로그에 리뷰를 쓰는 것이었다. 야망에 찬 초창기의 책 리뷰가 블로그에 몇 개 남아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리뷰를 쓰는 건 등한시하더라도 밀리의 서재에서 책은 꾸준히 읽었는데(진짜다, 언젠가 읽은 책들을 리뷰할 것이다) 그때 최강 게으름뱅이인 내가 스스로 약속한 것이 하나 있다.

 

 

책 한 권을 읽으면
그 책에 영향을 받은 한 가지 행동을 하자

 

나는 외부의 영향을 받기 쉬운 기질인지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크게 감명받고 새사람이 되겠단 결심에 불타곤 한다. 하지만 그 기분은 대부분 며칠을 못 간다. 엄청나게 감격하더라도 사흘 후면 다시 슈퍼 게으름뱅이로 돌아가고 만다. 감명받으면 뭐 하나, 변화가 없는데. 나 자신을 한심해하다가 한 다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행동 하나 하기'다.

 

나의 감동은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행동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존 크림볼츠, 라이언 바비노의 <빠르게 실패하기>를 읽은 날, 나는 대표님이 제안한 신규 프로젝트 지원사업의 완성심사 발표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완성심사를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주도해서 진행했다.

 

당시에 신규 프로젝트는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아이디어부터 초기 기획, 상용화 계획이 포함된 사업 신청서까지 내 손으로 직접 작성하여 지원사업 당선이 되었지만-참고로 발표는 하지 않았다- 참여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지체되면서 실무에선 멀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과욕임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욕심을 놓지 못해 두 가지 프로젝트의 실무를 동시 진행했다. 결론은 극도로 정신이 피폐해지면서 온 번아웃. 그때, 지친 마음으로 영종도의 바다를 보러 갔고, 모든 것이 욕심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회사에 돌아와 신규 프로젝트의 실무에서 빠지고 기존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대표님은 아직 내가 실무를 맡았을 적 스치듯 남겼던 '완성 심사 발표를 해보고 싶다'는 말을 잊지 않고 내 의사를 물어본 것이었다. 그 발표는 원래의 나였다면 당연히 거절했을 리스크가 있는 자리였다. 발표를 맡으면 완성 심사 결과물을 마무리하는 것까지 모두 주도해서 진행해야 했는데,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남아있어 보였다. 게다가 심사 결과에 많은 것이 달려 있어(보여)서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발표해 볼래? 란 질문에 대한 나의 마음 [출처:pixabay 작가:TheDigitalArtist]

 

제안을 받은 날. 나는 퇴근 전까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답하고 얼마 남지 않은 <빠르게 실패하기>의 남은 페이지를 정독했다. 책 속의 주요 조언은 '적은 노력을 들여 많이 해보라' 였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해서 정지하고 있지 말라'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상황이 그 조언과 100% 맞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기 계발서 완독이 부여한 흥분(?)을 동력 삼아 결국 발표 제의를 받아들였다. 지난 일이니까 말하지만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었고 덧붙여 말하자면 힘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한정된 시간 동안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부탁해야 하는가. 이전까지 나는 '무엇을 하는 누구' 포지션이었기에 프로젝트 전체를 바라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완성 심사를 위한 결과물을 책임지고 준비하면서 나는 프로젝트 전체를 내려다보아야만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없었기 때문에 일이 진행되는 결과만 기다릴 게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 앞서 보고 미리 요청하며 시간을 빈틈없이 사용했다. 제한 시간 동안 테트리스를 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일을 적합한 팀원에게 연결하고, 그것이 결과로 이어지는 경험은 책임이 주는 두려움, 쾌감을 동시에 주었고, 나무만 보며 등산하다가 정상에 올라 숲 전체를 처음으로 내려다본 것 같은 시야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완성심사 발표를 맡지 않았어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경험은 내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었을 게 틀림없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빠르게 실패하기>의 감동으로 진행했던 '신규 프로젝트의 완성심사 발표하기'란 행동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염소처럼 벌벌 떨면서 발표했지만, 우리 프로젝트는 심사를 통과했다. 이틀 밤을 새워서 건강에 적신호가 왔지만 지금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에게 그것이 찾아왔다. 

 

6개월 주기로 찾아오는 너란 녀석(bun out) [출처:pixabay 작가:RosZie]

무리를 해서 몸이 아픈 것이 방아쇠가 된 것일까? 심사 통과의 격렬한 기쁨이 짧게 나를 지나가고 불현듯 익숙한 허함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다시 책을 들었다. 항상 하던 것처럼 자기 계발서의 흥분이 나를 다시 활력감 있는 상태로 되돌려 주기를 바랐다. 이번에 고른 책은 유튜버로도 유명한 이준희(유튜버 '면접왕 이형') 작가의 <포커스(Focus)>였다. 

 

책의 주요 골자는 시간 계획의 필요성과 시간을 관리하는 방법론이었다. 항상 그렇듯 감탄을 하며 책을 넘기던 도중 내 눈에 딱 꽂힌 부분이 있다. 

 

더 많은 일을 위해서 시간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더 여유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기계도 과부하에 걸리면 고장 난다. 중요한 것을 먼저 배치하라!

-포커스(Focus)

 

왜 특별한 것 없는 두 줄이 그렇게 마음을 끌었을까. 날 영종도 당일치기로 이끌었던 이전 번아웃은 이유가 명확했다. 욕심 때문에 동시에 할 능력이 없는 두 가지 일을 붙잡고 있던 것. 일은 산더미인데 시간은 부족하니 정신만 혼자 공회전하다 탈진해 버린 거다. 하지만 이번의 번 아웃은... 번 아웃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를 정도로 애매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우울감이 내 마음에 드리워졌을 텐데 나는 그것의 그림자만 보고 실체를 볼 수 없는 느낌이었다. 일이 견딜 수 없이 많거나, 일의 진행이 막막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희뿌연 안개 같은 우울이 기쁨 뒤에 나를 찾아온 게 전부였다.

 

12월. 포항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포커스(Focus)>를 읽어나갔다. 연차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는 정말 이 시기에 여행을 가도 되는지로 머리가 복잡해 잠시 책 읽기를 멈추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나면서, 하나둘 올라오는 사내 메시지의 여상함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책의 남은 페이지를 읽어나갔다.

 

통영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찍은 사진. 마음에 든다

 

여유, 중요한 일, 균형. 이번 책에서 내 주의를 빼앗은 것은 이 단어들이었다. 저자는 중요한 일이 '인풋 대비 아웃풋이 눈에 띄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나의 중요한 일이란 무엇일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눈앞에 두고 생각하다 휴대폰을 끄고 창문을 보니 얇은 성애가 껴 창문 밖이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책 한 권에 하나의 행동을 하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이 다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책을 완독할 즈음이 되면 나를 갈등하게 하는 어떤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곤 했다. <포커스(Focus)>를 다 읽은 순간, 버스 안은 고요했고 대부분의 사람이 잠을 자거나 미디어를 보는 등 자신의 일에 빠져있었다.  아직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면 나도 모르게 어떤 일은 벌써 일어나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성애낀 창문 너머로 심심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가 없어도 되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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