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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재활기/일기를 쓰자

[220603] 중요한 순간에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 (feat. self-sabotage)

by 김알람 2022.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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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ixnio 작가:Bicanski

 

5월 하반기를 바쳐 작성한 지원사업에 서류 합격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받고 나서 기쁨도 잠시, 곧 두려움이 들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지원사업 서류를 작성했지만 정작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주위는 모두 자기 일로 바쁘다. 도움을 청하면 모두들 함께 머리를 모아주겠지만, 남들의 시간을 무한정 뺏을 수도 없다. 퇴근 30분 전에 메일을 확인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메일을 확인한 후 5분 만에 땅 멀미라도 하듯 속이 약하게 울렁거렸고 남은 3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며 들었던 수업 중에 '일상 속의 심리학'이라는 과목이 있다. 수강하던 중 'self-sabotage(자기 방해)란 개념을 배웠는데 오늘, 버스를 타고 퇴근하던 중 그 단어가 문득 생각났다. 

 

'자기 방해'실패할 게 두려워 스스로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다. 실패에 예견된 장애물을 설치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행위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시험 전 날 술을 마시고 '숙취' 때문이란 핑계로 시험을 대충 봐 버리는 것이다. '숙취'라는 장애물이 있었으니 '실패'는 정당화된다. 나중에는 '숙취만 아니었으면 안 망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기분이 나아진다. 실패는 나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장애물' 때문이란 생각이 들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보호된다.

 

어떤 경우는 원하는 것을 원하는 걸 부정하기도 한다. <여우와 신포도>의 여우처럼 말이다. '저 포도는 분명 실 거야' 하고 세뇌하다 보면 내가 정말로 저 포도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 뿐이다. 나(여우)는 포도를 원한다. 하지만 가질 자신이 없기에 원함을 부정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킨다. 

 

'자기 방해'가 단기적으론 자존심을 지켜줄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방해하는 데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도전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자존심을 지켜왔기 때문에 이상은 높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현실은 바닥이다. 이상과 현실의 간격이 커지면 커질수록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방어벽은 점점 견고해진다. 그렇게 나이만 먹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30분 동안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방해해왔나를 생각해보았다. 대학에 다닐 적, 나는 프랑스 문학 교양에서 발표를 포기한 적이 있다. 준비를 해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3일 동안 한 단편 소설을 정독하는데 어느 순간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해당 단편소설은 완벽한 그림에 집착한 한 화가와 그 그림을 감상한 또 다른 사람(주인공)을 그리고 있었는데,  화가의 기괴한 그림을 묘사하는 주인공의 속마음을 몇 페이지에 걸쳐 묘사한다. 그 알 수 없는 묘사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장황한 묘사가 서양 미술사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피렌체 중심의 선화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색조 미술의 발전이 그 몇 페이지에 걸쳐 두, 세 문장씩 나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이 이론(?)을 발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표 전 날 PPT를 새로 만들었다.

 

당시에 전공 기초로 어째선지 서양 미술사를 배우고 있었기에 미술사에 대해서 주워들은 게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새벽 감성 때문일까? 내 생각은 타당해 보였다. 카페인에 취해 밤을 새워 PPT를 준비한 후 강의실에 갔는데 수업이 시작되자 새벽의 패기는 금세 사라졌고, 떠오르는 건 내 우스꽝스러운 논리가 철저히 격파되는 상상이었다. 그날 나는 전반부의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쉬는 시간에 교수님을 찾아가 PPT준비를 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발표를 드롭했다. 

 

느슨한 교양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내 인생에 손발에 꼽힐 정도로  바보 같은 일이었다. 내가 그 새벽에 한 엉뚱한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다. 비웃음이 무서워서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것에 도전하는 게 나는 항상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도 나중에 가선 힘들었다. 더 많이 알 수록, 내가 아는 게 얼마나 적은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무언가를 '완전히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직 잘 모르니 잘 알게 된 다음에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르는 게 까발려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더더욱 모르게 된다.

 

'인생에 배움은 끝이 없다'는 말도 있다.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도 그 분야에 대해 모든 걸 알진 못한다. 배움이 끝이 없는데, 나는 '완벽한 채로 시작'하고 싶어 한다면, 나는 도대체 언제 무언가를 '완전히 알' 수 있고, 언제 그 분야에 자신감을 가져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완벽한 상태로 시작하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치명적인 '자기 방해'가 아닐까 싶다. 진짜로 준비가 덜되서 준비를 하고 시작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엔 영원히 준비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나다. 만약 이 글을 읽고 뜨끔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치명적인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던 건 아닌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내가 놓아둔 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면서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쉰 적이 없는 지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사람이 못 변할까. 버스에서 내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발표가 잘 될지, 최종 결과가 어떨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저 나의 목표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할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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