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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재활기/일기를 쓰자

부리분켄: 우리는 왜 SNS를 할까?

by 김알람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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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일무이함의 환상을 꿰뚫어본다.
우리는 세계 정신의 손으로 빠르게 써내려가지는 철자들이며,
우리는 의식적으로 글 쓰는 권력에 몰두한다. 

글을 쓰는 세계 역사와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나가 된다면,
세계 역사의 정신을 포착한다면,
우리는 그 정신과 같아지고 - 쓰여지는 것을 멈추지 않고서도- 
동시에 우리 자신을 쓰는 자로 정립할 수 있다. 

이것이 세계 역사가 부리는 간계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세계 역사가 우리에 대해 쓰는 동안, 우리가 세계 역사에 대해 쓰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430~431p - 

 

출처: Pixabay 작가: Pexels

3월 1일, 독서 모임 스터디에서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완독 했다. 2022년 6월부터 시작했으니 책 한 권을 완독 하는데 약 8개월이 걸린 셈. 지인으로 구성되어서 모임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는 일이 잦았던 모임이다.  '과연 이 스터디가 중간에 공중분해되지 않을 가능성은?' 스스로 던진 수많은 물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 권의 책이 끝났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 책의 30%는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키틀러는 매체유물론자로, 인간 인식의 변화는 매체의 변화에서 파생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어떻게 600여 쪽의 책으로 독자를 설득시키는지는 책 리뷰에서나 다뤄보고, 오늘 이야기해보고 싶은 건 <타자기> 파트에 있던 일부분이다. 부리분켄.

 

부리분켄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검색을 해 보았지만 독일어 원 단어를 알지 못해선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요약한 부리분켄(주의자)란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매일 기록하는 사람들"

 

신세대 부리분켄 주의자로는 매일 sns(인스타, 트위터, 페이스북)를 업데이트하거나, 블로그로 일기를 쓰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다. 물론 고전적인 방식으로 혼자만이 볼 수 있는 일기를 매일 쓰는 사람들도 이 범주에 (당연히) 포함된다. 

 

책에 따르면 부리분켄(이하 부리분켄 주의자)은 매일 일기를 써야 하는데, 강요되는 양식은 없다. 매너리즘에 빠져 일기 쓰기가 지루해지면 '그 지루한 느낌에 대해' 일기를 쓰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이제 일기를 쓰지 않겠어"라는 일기를 쓰는 것도 좋다. 단 하나의 금기가 있다면 바로 "쓰지 않는 것"이다.

 

쓰기를 거부한다고 쓰는 대신 실제로 쓰기를 멈춰버리는 사람은 보편적인 정신적 자유를 남용하는 것이기에 그의 반사회적 태도로 인해 철저하게 대가를 치른다. 발전의 수레바퀴는 스스로는 침묵한 채 침묵하는 자를 밟고 굴러가면서 그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기에, 결국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 425~426p 인용


쓰지 않는 부리분켄은 결국 운명의 철퇴를 맞는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주변부로 밀려나가 다른 부리분켄들을 위한 외적인 조건을 마련하는 최하층으로 전락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근 1년 간 꾸준히 화두에 오른 '퍼스널 브랜딩'이 생각났다. 현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어떤 개념이 몇 백 년 전의 인간 현상과 맞물린다고 생각하니 재미있다. 그리고 흥미와 동시에 머릿속에 울린 것은 '부리분켄 주의자처럼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였다. 

 

키틀러의 책을 읽으면 '인간이 해체된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키틀러의 책을 읽지 않아도, 인터넷의 핫한 뉴스 몇 개만 봐도 인간 존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AI의 등장, 챗GPT가 보여주는 놀라운 생산성. '인간만이 고유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근원적 공포. 사실 이런 공포를 느끼는 이유야말로 보잘것없는 자의식 때문일 수 있겠지만, 수백 년 동안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며 근자감(?)을 높여 놨으니 '현실을 알려줌, 너네 아무것도 아님.'하고 진실을 밝혔을 때 느낄 공포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변명해 본다.

 

비단 인간이란 범주로 확대하지 않아도, 우리가 소속 집단에 소속감을 넘어선 동질감을 느끼는 현상은 흔하다. 내가 졸업한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는 회사. 소속에 스스로를 동기화해 생각하면 소속이 흩어지는 순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정의한 모든 것도 함께 흩어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부리분켄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 기록, 우주의 크기 안에서 나란 존재는 점과 먼지에 불과하지만 내가 쓴 나의 기록 안에서는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도대체 뭘 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괴로울 때, 일기장을 열어서 당시의 기록을 볼 수있다면, 그때 내가 무슨 감정을 느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다면 흔들리는 나 자신을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일기가 아니라 인스타, 트위터, 블로그, 페이스북이나 아니면 틱톡이면 어떤가?

 

"세계 역사가 우리에 대해 쓰는 동안, 우리가 세계 역사에 대해 쓰는 것"

사실 우리를 등장시켜주지도 않을 세계 역사에 대한 반발로 나 자체가 세계인 역사를 쓰는 것. 그것이 나의 기록인 것이다.

우리 모두 부리분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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