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정신이 지쳐 연차를 사용하고 쉬었다. 주말 동안 누워서 여름잠을 자고, 드라마나 몰아보다가 이래선 휴가가 아니라는 생각에 여행 계획을 짰다.
심란한 마음에 자연 구경을 하고 싶었고, 저질 체력인 내게 산은 무리였다. 물을 보기로 마음을 먹고 계곡과 바다 중 하나를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1박 2일을 생각했으나 여행 계획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머리를 비우고 싶어서 가기로 한 여행의 계획을 세우다 다시 머리가 아파지는 게 웃기는 상황이었고 그냥 서울 인근의 바다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바다를 보다가 하루 더 있고 싶으면 당일에 숙소를 잡으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가기로 한 곳이 영종도였다.
당일치기 여행 계획(?)
집(13:00 출발) - 인천공항 - 황해 해물칼국수 2호점 - 바다 보기 - 야경 보기 - 저녁 먹고 집 가기
바다를 좀 보고 맛있는 걸 먹는다. 놀랄 만큼 추상적이고 후진 계획을 가지고 전날 밤 잠에 들었다. 이왕 여행을 가는 거, 맛있는 걸 하나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당일 오전에 황해 해물칼국수에 전화해 영업 중인지 확인도 했다. 1호점은 닫았고 2호점은 영업 중이라는 말에... 그제야 어기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행을 가는 건데... 즐겁기만 해도 모자랄 판에 그날 아침의 난 무기력했다. 아침에 출발하기로 한 스스로와의 약속도 깨뜨리고 오후가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여전히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목표는 영종도에 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잡았다.
화요일의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햇볕은 뜨거웠다. 원래 썬크림을 안 바르는데 이 상태로 바다와 맞닥뜨리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올리브영에 들려 부랴부랴 썬크림을 샀다. 가게에서 나와 구석진 곳에 숨어서 얼굴과 팔에 덕지덕지 썬크림을 바르고 환승에 환승을 거듭해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생각이 많을 때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누군가의 명언(?)은 옳다. 몸을 움직여 공항에 도착하자 무기력했던 정신에 일말의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사진에 잔상이 저렇게나 많은 것은... 나도 모른다. 어느 순간 휴대폰 카메라에 흠집이 나 있었다. 사진은 엉망이지만 내 기분은 들뜨기 시작했고 황해 해물칼국수 2호점으로 가는 버스를 검색한 후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1층 버스 정류장에서 말이다.
6분의 기다림 끝에 도착한 306 버스. 신나서 버스에 타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덕교동 정류장 가죠?' '아, 그거 3층에서 타야 해요.' 정확한 정보를 주고 그렇게 버스는 떠났다. 젠장... 공항철도에서 내렸을 때가 3층이었는데, 괜히 1층까지 내려와 뻘짓을 한 것이다. 부랴부랴 카카오 맵을 확인 해보니 떡하니 인천공항 T1(3층)이라고 적혀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가 10분가량을 더 기다렸다. 버스를 타서 휴대폰을 확인하니 이미 시간은 3시에 가까웠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뱃속은 반란을 일으키듯 소란했다. 바다를 좀 보다가 식사를 할까 했지만... 바다는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칼국수 집에 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으니까, 이런 경우에는 산이 아니고 바다지만 말이다.
황해 해물칼국수 2호점
주소: 인천 중구 마시란로 37
영업: 매일 09:00 - 20:00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에서 306번 OR 111번을 타면 된다. 306번인 경우 덕교동 정류장, 111번인 경우 용유역 정류장에서 내려 지도를 보고 걷다 보면 황해 해물칼국수 2호점이 보인다.
황해 해물칼국수 옆에는 미에네 바닷속 칼국수 2호점도 있다. 검색해보니 거기도 나름의 맛집이었다. 황해 해물칼국수가 황태를 넣어 진하게 끓인 육수를 사용한다면 미에네 바닷속 칼국수 2호점은 맑은 국물이 특징이라고. 잠시 고민했지만 원래 난 진한 국물을 좋아하는 데다 전화해서 영업 중인지 물어본 것도 있어서 황해 해물칼국수 2호점으로 결정했다.
황해 해물칼국수 2호점 맞은편에는 방태막국수 영종 마시란 점도 있다. 이곳도 가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화요일은 휴무였다.
메뉴 걱정할 필요 하나 없이 메인 메뉴는 해물 칼국수 하나다. 인플레이션의 여파인지 그새 2000원 오른 가격을 확인하고 해물 칼국수 1인분을 시켰다. 2인 이상이었다면 산낙지를 추가해 먹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쉽다.
긴 기다림 끝에 내 앞에 놓인 해물칼국수 1인분.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 않게 해물 양이 상당했다. 특히 가리비가 맛있었다. 곳곳에 보이는 황태 덕분에 국물이 걸쭉하고 진하다. 해물 절반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맛있기만 했는데 그릇 바닥으로 내려가니 몇몇 조개에서 뻘이 씹혔다. 그래도 12000원의 가격에 이렇게 싱싱하고 양 많은 해물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만하다.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늦은 점심식사였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가게 밖으로 나가기 싫었지만 가게에서 시간을 버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느릿느릿 일어섰다.
황해 해물칼국수에서 나와 해안을 따라 쭉 걸었다. 바다를 보고 싶었다.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날씨 탓에 발걸음이 무거웠고 바다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느릿느릿 걸어서 어떤 조개 구이집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 너머로 보이는 서해의 모습에 잠시 멈춰 섰다. 이곳에서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나 살펴보았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다시 걷다 보니 공용 화장실과 함께 굉장히 거대한 주차장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시란 갯벌 체험장의 간판이 보였다.
초기의 목적은 바다를 구경하며 을왕리 해수욕장까지 1시간가량을 걷는 것이었지만 이 날씨에 그런 짓을 하면 열사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번뜩이는 직감이 들었다. 마시란 갯벌 체험장 주차장에 있는 벤치는 여기서 쉬라며 나를 유혹하는 듯했고, 나는 그 유혹에 기꺼이 응했다.
벤치에 앉아서 바다와 하늘을 감상했다. 가끔 갈매기가 괴성을 지르며 날아다니고, 평일 낮인데도 바다를 찾은 가족들이 산책을 하는 바다는 평화로웠다. 십 분여 간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자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잠이 왔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사람도 없는 거, 지갑이 든 가방을 베고 벤치에 잠시 누웠다. 내 얼굴에 작열하는 태양에 미소가 지어진다. 올리브 영에 들리길 잘했구나. 가방 옆 주머니에 항상 꽂아두는 삼단 우산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바닷소리를 들으며 잠시 누웠다. 갈매기는 정말로 시끄럽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약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넘실대던 바다는 갯벌을 드러냈고, 조개 캐기를 체험하려 기다리던 가족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맨발로 뻘을 밟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은 5시를 지나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해풍을 맞았더니 온몸이 끈끈했다. 햇빛이 따듯하다는 생각은 했는데 우산에 시야가 가려져선지, 아니면 통 편하게 자지 못해서인지 벤치에서 깜빡 존 모양이었다. 슬슬 기울기 시작하는 해는 이전보다 덜 뜨거웠고 거울같이 햇빛을 비추는 갯벌의 모습은 묘한 감상을 주었지만 어서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 벤치에서 잠을 잔 것도 쪽팔렸고, 무엇보다 미친 듯이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황해 칼국수 주변에 엠클리프란 절벽 카페 간판이 있던 걸 확인하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일몰은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해변에 앉아서 일몰을 보려고 돗자리도 챙겨 왔지만 시원한 카페에서 일몰을 보는 게 더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황해 해물칼국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던 중에 뭔지 모를 작은 건물에서 청초수 물회·섭국 전단 현수막을 발견했다. 영종도 물회 맛집은 선녀풍이 유명한데, 여기도 화요일 휴무다. 난 물회를 먹어본 경험이 없어서 영종도에 와서 물회를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은 차에 잘됐다 싶어서 현수막을 찍어 놓았다.
그 후론... 다시 걸었다. 약 10분 동안. 해가 지는 중이라 다행이었다. 어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편하게 일몰을 기다리고 싶던 차에 저 멀리서 아까 보았던 엠클리프의 간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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